추억 속으로~
95년도에 처음 중국에 발을 딛고 98년도에 중국 요녕성 수암현을 들어가 버렸다. 중국 생활 6년 반 동안은 일을 핑계 삼아 많은 곳을 여행했다. 요녕성이면 중국의 북쪽이고 사진 이미지는 남쪽을 가던 중이었으니 어찌 보면 여행자가 훨씬 더 잘 어울리던 시절이었다.. 광활한 중국은 일주일간 열차를 타고 비슷한 풍경 일색이니 차창밖은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열차 내에서는 재미있는 풍경 일색이었다.
그때만 해도 통역과 한국말을 하고 있으면 얼굴을 돌리고 쳐다보면서 많이들 궁금해하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어설픈 중국어 솜씨로 최대한 이야길 한다. 어순이 틀리면 바로 잡아주고.. 그런 일들이 재미있었다. 아하~ 이래서 현지어가 익숙해질 수 있겠구나 하는 경험이 참 많았다.
내가 살던 지역이 단동에서 택시 타고 두 시간가량의 거리였으니 제법 시골 쪽이었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정말 한량이었다.거래처에서 주문 의뢰가 들어오면 일 잘하는 통역에게 일을 시켜놓고 난 그저 이곳저곳 일을 핑계 삼아 여행을 하곤 했다.물론 새로운 일에 관한 경험 미숙으로 더러는 속임을 당하기도 했고.. 누굴 탓하랴 내 일하는 방법의 게으름 탓일 뿐이지. 타산지석으로 삼고 지금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곳에서 4년 반을 살았으니 나보다 중국어 솜씨가 훨씬 좋은 지인의 말은 못 알아듣고 내 이야길 알아듣는 상인들과의 해프닝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지역의 사투리를 썼던 모양이었다. 그 동네에선 바디라는 리어카를 타고 사람이 바퀴 돌리며 굴라던 그 발디는 1인당 1원이었고 그 당시에 1원은 한국의 100원이었다. 재미있어 짬나는 대로 발디를 타고 돌아다니고 야시장의 풍경을 즐기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4명이 탈 때 그 일을 하던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이색적인 분위기를 즐길 뿐이었다.
중국을 떠 올리면 잊히지 않는 몇 가지 장면이 있는데 사람이 죽었을 때 엄청 슬프게 울어주는 장면을 봤는데 그 일을 돈 받고 한다고 한다. 중국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누가 봐도 엄청 슬픈 광경이었다. 4년 반 정도를 머무르던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리석고 철없던 시절이라고 밖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수시로 안마도 즐기도 새로운 풍경을 즐길 뿐 그들의 돈벌이 수단이 많이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한 길거리 옆에 돼지 목을 잘라서 늘어놓는 풍경들 일색이어서 첨엔 징그럽더니 그조차도 일상이 되어 서서히 중국 사이에 젖어들었고 닭과 병아리 돼지가 떼를 지어 길거리를 활보하던 풍경도 생생하다. 저녁때가 되면 집을 잘 찾아가는 그 동물들의 생리가 무척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게 그 지역에 살다가 저장성에 들러 갑장인 남자 친구의 권유로 저장성 이우로 이주를 해서 거기서 1년 반을 살았다. 통역을 두고 한국에서 주문하는 오더를 탐색하는 일이 주 업무였던 나는 그때 나이 마흔 초반 즈음에 나는 늦었다고 생각했다.그 당시 이십 대 후반의 젊은 친구들이 이미 인터넷 환경으로 한국과 직거래 중이었으니.. 시절 인연은 그 누구도 막을 방법을 알 수가 없다고 느꼈을 뿐.
통역이 물었다. 사장님 지금 3개월째 나가지 않고 계십니다. 내가 대답했다. 궁금하면 네가 나가보라고.. 이미 내 능력으로 거래를 잘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제법 괜찮은 일이 들어와 거래할 생산공장을 여러 군데 다녀보고 한 군데 결정하는데 통역과 함께해서 가격을 결정하고 한국에 통보를 했다. 가베라는 어린이들의 나무 놀이기구였다. 본디 독일의 프뢰벨이 만든 창의력, 공간지각력을 높여주는 놀이기구인데 독일 제품은 값이 많이 비싸니 중국에서 똑같이 만들어 한국에서 저렴하게 팔 심산으로 내게 오더가 온 것이었다. 그 가베를 생산할 때 엄마를 따라온 6살 남자 애기가 엄마를 따라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잠깐 한두 번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꾸준히 일을 하고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끔씩 sns에 보면 그 정도의 어린아이가 익숙하게 음식을 조리하는 모습이 나오곤 하는데.. 그건 실화라고 믿으며 환경에 따라 어린아이도 그런 능력들이 가능하다는 걸 믿는다. 그런저런 환경들에 젖어가면서 혼자 돌아다닐 정도의 여행도 몇 차례 했으니 지금보다 젊은 혈기이긴 했다. 사진을 보니 지금보다 이미지가 참으로 강하게 느껴진다. 중국에서 살다 보니 씻지 않고도 편하게 사는 방법들이 익숙해져서 중국이 훨씬 편하게 여겨지곤 했다.
서울에 집을 두고 중국에 살다시피 하면서 중국에 제조공장도 했고 한국에서 공산품의 주문 의뢰 등으로 살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중국일을 철수하는데 6년 반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한국으로 돌아왔고 산골로 자리 잡아 제천에 둥지를 튼 지 19년 차. 이젠 제천이 고향이 되어 타 지역에 여행을 갔다가도 제천으로 돌아오면 푸근해지니 나이가 들긴 든 듯싶다. 롤러코스터였던 지난시절 덕분에 지금은 매우 차분해졌으니 경험이 스승 되고 현재에 만족도가 백 퍼센트임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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